개인성의 가치: 내가 믿는 철학과 월클을 향한 길

Joshua Kim
12 min readOct 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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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생이 온다

나는 1990년생이다, 그리고 우리는 ‘낀 세대’다

나는 1990년생이다. 오래된 동갑내기 친구들과 이야기 나눌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낀 세대야.”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어린 아이로 취급하고, 소위 “요즘 세대”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우리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은 우리를 “살짝 구시대에 가까운” 사람으로 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어느 한쪽에도 자연스럽게 속하지 못하는 애매한 세대에 머무른 기분을 느낀다.

사실 90년생만 그렇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대에 상관 없이, 각 개인이 속한 집단의 나이 구성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해봤을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30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많은 조직이나 소사이어티 내에서 애매한 위치에 놓인 경우가 많다. 어느 영역에도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그럼에도 자유와 책임은 굉장히 많은 그런 나이.

내 주변 동갑 내기를 돌아보면, 이미 부모가 되어 초등학생 자녀를 둔 친구도 있고, 비혼주의자로서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친구도 있다. 혹은 어쩌다보니 이제 막 경제 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 친구도 있다. 그만큼 내가 속한 세대는 “포지셔닝이 이러하다”라고 자신 있게 규정 짓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나 또한 종종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내가 지금 올바른 자리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불안감이 생긴다.

하루 24시간의 9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그룹에 속하려고 시도해봐도, 뭔가 항상 맞지 않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왜 이렇게 애매한 위치에 있을까?’

“경험이 많아 보여야 하는” 시기인가?

30대 중반은 흔히 사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나이로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나이에 인생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지니기도 한다. 기업이든 국가기관이든, 실무자로서 역량이 가장 꽃 피는 시기라고 들은 적도 있다.

매년 스승의 날마다 찾아뵙는 교수님께서 내게 이런 농담을 하신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 GDP 중 대부분은 네 나이대의 사람들이 다 만드는 거야. 그러니 열심히 일 해.”

교수님을 인간적으로 너무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나는 그런 말들이 불편하다. “30대 중반”이라는 범위에 스스로를 끼워 맞춰야 하는 것인가.

주변 동갑내기 친구들을 보면, 나이 적어보이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깔고 중후한 척을 하는 친구들도 있고, 반대로 나이가 많아보이는 느낌을 벗어나고자 철 안 든 척하거나 외모 관리에 병적으로 과도한 소비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 안타깝지만, 나는 이런 행동들이 어리석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결국 스스로를 왜곡하는 방어 심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런 “방어 기제”로서의 노력들이 역설적이게도 결코 스스로를 지켜주지 않기 때문에.

The Art of Pretending

자아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 모든 노력들이 쓸데없다는 것이다. 굳이 스스로의 겉나이와 겉경험을 포장하거나, 반대로 젊음을 강조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스스로의 본질은 그런 포장과 강조 자체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포장하는 데 노력과 시간을 소비하는 건 자아의 본질을 왜곡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나이가 주는 위상에 집착하기도 한다. 괜히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 자신이 “유경험자”인 것처럼 드러내기 위해 인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게 설령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잘 방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몇 년 전에 이미 답을 내렸다. 아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답을 내린 이유는 간단하다. 겉나이를 포장하는 건 결국 이 사회의 기준과 잣대에 나를 끼워 맞추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내 자아를 변장하고 가공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다. 그것은 본래 나의 모습, 나의 자아를 억누르고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내 자아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그 본질을 그대로 놓아두는 일이다. 나이를 앞세워 내 자아를 변형시키는 것은 결국 내 자아를 부정하는 일에 다름없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며 나의 본질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낀 세대”라는 범주 속에 나를 가두지 않기

나는 결국 90년생이라는 ‘낀 세대’로 나를 정의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사실 90년생이라는 세대적 정체성 자체가 나라는 개인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대는 그저 하나의 범주일 뿐이다. 나라는 개인 자체를 오롯이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개인에 따라 범주의 공통 특성과 정반대일 가능성도 있다. X, Y, Z 등 세대적 특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밈 현상이 있지만, 나는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세대라는 잣대에 맞춰 평가하기에는 각 개인은 그 범주보다 훨씬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결국 개인의 자아를 왜곡하고 오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Who Are Boomers, Gen X, Gen Y, and Gen Z?

세대라는 개념 혹은 사회적 범주들은 그 자체로 틀렸다거나 비합리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클러스터링이라는 행위는 사실 통계학의 영역이기도 하고, 유사성이나 공통 현상에 더 강하게 자극하는 인지심리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범주를 통해 한 개인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시도다.

사실 클러스터링 알고리즘도 하이퍼 파라미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성별, 인종, 민족, 국적 등 많은 범주들은 강의 최하류에서 바다와 강을 구분하려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성별이 자연적 혹은 절대적 범주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Straight,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stioning, Queer, Intersex, Asexual 등 성적 지향성이 정의하기 모호한 영역에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존재한다. 인종과 민족도 피가 끊임없이 섞여 있는 상태이므로 애초에 과학적인 분류 체계 정립이 불가능하다. (눈대중으로만 대강 가능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결국 개인이 속한 모든 집단적 범주는 그 사람의 개인성을 결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개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나는 “개인”이라는 존재를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남자라는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나는 흔히 말하는 “사회적 남성성”과 거리가 멀다. 순발력은 타고 났지만, 근육질 몸매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굉장히 예민한 편이라, 어떤 현상이나 타인의 표정/언행에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느끼고 기억한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 딱히 없다. 나는 가톨릭 신자지만, 주변에 무슬림 친구들이 꽤 있고, 그 친구들과 놀다가 기도 시간이 될 때마다 근처에 가장 가까운 이슬람 사원에 데려다 주는 것도 익숙한 편이다. 이처럼 내가 달고 있는 남자, 한국인, 가톨릭 신자라는 범주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범주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오류만 낳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기도 하다. 개인은 범주로 설명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다. 누군가를 그저 여성, 남성, 한국인, 아시아인 등으로 정의하고 그 기준으로만 이해하려는 것은 그 사람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범주적 사고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회적 문제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나치즘과 홀로코스트 같은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 조차 개인을 집단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제노포비아, 우생학이라는 유사과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COVID-19 Outbreak 이후 확산된 중국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 진압 등은 모두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집단으로 판단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수많이 목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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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연과학과 통계학의 시각에서 범주적 사고 자체가 아주 비합리적인 현상은 아니다. 낯선 존재를 마주하여 경계심이 들었을 때, 그 존재를 빠르게 파악하는 것은 생물로서의 본능일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가장 쉽게 획득할 수 있는 “범주” 정보를 통해 그 존재 자체를 인지하려는 행위는 생존 본능일 것이다. 그리고 통계학 측면에서도 특정 사람의 국적을 맞춰야 한다면,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보다, 그 사람의 생김새를 본 상태에서 맞출 확률이 더 높은 것도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이 그렇다고 해서 “윤리학”이 그럴 이유는 없다. 즉, 사실성과 당위성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본능적으로 마약 중독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으니 마약을 계속 투여하는 것은 괜찮다”, ”사람의 성욕은 타고난 것이므로 내 행위는 시선 강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위다” 등의 주장은 모두 사실성과 당위성을 같은 영역으로 놓았을 때 도출되는 대표적인 논리 오류들이다.

결국, 우리가 개인에 대한 범주적 사고를 자연성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규범을 만들어 살아가는 한 개인은 온전히 개인으로 이해해야 한다. 윤리학의 토대인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내가 월드클래스가 되고 싶은 이유

그렇다면, 나는 왜 월클이 되고 싶어 하는가? 돈과 명예를 위해서일까? 물론 돈이 많으면 삶이 더 편해질 것 같고, 명예를 얻는 것도 꽤 달콤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월클이 되고 싶은 궁극적인 이유는 아니다.

내가 월클이 되고 싶은 이유는 하나다. 사람들이 개인을 집단으로 판단하지 않고, 개인으로서 바라보는 세상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범주화하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개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특정 집단의 편견을 기반으로 개인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백지의 상태에서 그 복잡하고 어려운 미지의 각 개인성을 하나하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월클이 되어, 나는 내가 믿는 철학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BTS 처럼 UN 연설을 하여 직접 “Beyond labels, we find our true selves.”의 슬로건을 전달할 수도 있고, 이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영화로 제작하거나 혹은 제작에 투자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나만의 자서전을 출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내 이야기가 더 많은 이들에게 닿는다면, 인플루언서로서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월드클래스가 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가진 가치관과 철학이 사람들에게 닿고, 이해의 폭이 깊고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에서다.

Michael Jackson — Heal The World

월드클래스라는 목표: 내 신념을 전하는 도구

사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는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워낙 개인적인 영역이라 공론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일을 지금도 틈틈이 하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으로서 영향력의 한계에 체념할 때가 많다.

이 꿈의 실현 가능성을 위해서는 내가 그만큼 인플루언서가 되어야 한다. 나는 돈과 명예보다도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월클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나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목소리가 더 널리 퍼질 수 있는 무대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월클의 위치에 오른 후,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함께 맡는다. 손흥민, 김연아, 김연경, 박지성, 아이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세계적인 인플루언서들은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통해 전세계 어린이들을 돕거나 환경 보호를 위한 앰버서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나 역시 내가 속한 데이터 분야에서 월드클래스가 되어, 개인을 개인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중받는 사회

내가 바라는 세상은 결국 개인이 그 자체로 존중 받고 이해되며, 집단의 일부로만 평가받지 않는 “이해와 소통의 폭이 넓은” 사회다. 누군가를 범주화하고 그 집단의 특성으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이해와 소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넘어, 편견과 혐오주의, 그리고 반대급부로 각 개인 역시 자신의 개인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범주에 자신의 자아를 끼워 맞추며 불행하게 살아가게 된다.

사실 월클의 꿈을 가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고되고 벅차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흘러갈 때마다 스스로가 아주 조금씩 월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 꿈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 느낌은 정말 달콤하다. 그래서 나는 뜨거운 마음으로 (가끔은 몸에 베여 기계적으로) 내 전문성을 끊임없이 갈고 닦으며 데이터 필드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어떤 열등감 극복과 같은 동기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믿는 메시지를 세상에 더 널리 퍼뜨리고 싶어서다.

선한 영향력: 내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발자국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내게 항상 해주신 말씀이 있다.

“세상을 이롭게 하고 주변 사람들을 빛내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어릴 때는 고지식하고 케케묵은 말씀 처럼 들렸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이 말씀에 세뇌가 들었겠지만 내가 정말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으며 살아가는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하다.

가장 친한 벗이자, 사랑하는 내 연인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신다.

“월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백 받아준 거니까 열심히 잘 해.”

물론 월클은 내가 만드는 직함이 아니라, 세상이 지어주는 직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진인사 대천명”을 마음에 새기며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한참 남았지만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오면, “한 번뿐인 인생, 그래도 참 뿌듯했다”하고 생각하며 소풍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란다.

You know what, we’re gonna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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